“대변할 수 있는 이들, 특히 스스로를 대변할 수 있는 이들은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스스로를 대변할 기회가 없는 이들은 인간 이하로 취급될 위험이 크다. 아니, 실제로는 아예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수 있다.”
- 주디스 버틀러(2004), 위태로운 삶: 애도의 힘과 폭력 중
(원문 ‘Precarious life: The powers of mourning and violence’ 중 p.141 문장 직접 번역)
언론학 석사 공부를 하면서 ‘대변(representation)’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언론이 특정 인종, 계급, 젠더를 어떻게 대변하는지가 사람들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치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자원과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대변되는 방식도 평등하지 않다. 주디스 버틀러가 지적했듯 한 사회에서 ‘위태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일수록,, 왜곡된 방식으로 대변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 장애인, 한부모가정, 이혼/비혼자, 경제 취약자, 노인 등이 사회에서 어떻게 대변되는지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어려서부터 ‘정상적인 삶’이 정해진 양 교육받고, 모범 답안과도 같은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 이외의 삶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배제된다. 위태로운 삶을 사는 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스스로를 대변하는 게 중요한 이유다. 사회는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흘러간다. 배제된 이들에게 목소리를 낼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최근 반가운 두 목소리를 접했다. 아무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목소리를 냈고, 덕분에 이제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두 목소리의 주인공은 ‘임계장 이야기’(2020, 후마니타스) 저자 조정진 선생님과 ‘김지은입니다’(2020, 봄알람) 저자 김지은 씨다. 조 선생님은 36년간 근무한 공기업 퇴직 뒤 ‘임시 계약 노인장’으로 버스회사, 아파트, 빌딩 경비, 다시 버스회사 경비 업무를 전전하며 보고 느낀 일을 기록했다. 김지은 씨는 전 충남도지사 안희정의 수행비서로 일하며 당한 성폭력 피해와 그 이후의 일에 대해 썼다.
나는 두 분의 책을 비슷한 시기에 읽으며 공통점을 발견했다.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꿈꿨고, 이를 조금이나마 이뤄보고자 한 일터에서, 아니 사회에서 수모를 당한 사람들. 하지만 그 사실을 전하는 목소리가 놀라울 만큼 담담하다. 악다구니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수치를 견뎌야 했는지 조곤조곤 전할 뿐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리다. 오래 지속될 것 같은 쓰라림이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그제까지는 참 아름다웠는데, 이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은행잎이 아름다운 건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다. 우수수 떨어진 은행잎들이 내게는 치워야 할 쓰레기일 뿐이다. 낙엽을 치우는 일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득 낙엽을 모두 발로 뭉개 버리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뒹구는 낙엽을 보고 예전 같으면 아련한 감성이 솟아났을 텐데 이제는 화부터 치밀게 된 것이다. 스스로가 놀랍고 서글펐다. p.96
어쨌든 경비원 유니폼에 이어 명찰을 받고 보니 '직업이 노출된 자'에서, 이제는 '이름까지 훤히 노출된 자'가 되었다. p.108
자네는 경비원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네.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폐기물 더미에서 숨을 쉴 수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런 초소에서 잘 수 있겠어? 사람이라면 어떻게 석면 가루가 날리는 지하실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자네가 사람으로 대접받을 생각으로 이 아파트에 왔다면 내일이라도 떠나게. 아파트 경비원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경비원은 할 수가 없어."-p.124
하지만 세상은 기꺼이 손을 더럽히는 사람들에 의해 깨끗이 정리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p.170
- 임계장 이야기 중
집에 들어오면 또 다른 경계가 생긴다. 어디에서든 내 존재가, 내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아직도 힘들다. 특히, 투명한 약 봉투에 박힌 세 글자가 싫다. 내 이름이 인쇄되어 있다. 그 이름을 그대로 둔 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너무 찜찜하다. 내 흔적이 싫다. - p.266
- 김지은 입니다 중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분들의 처우가 좋지 않다는 것, 일부 몰상식한 주민들로부터 갑질을 당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몇 해 전 서울 한 아파트 단지에서 이런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비원 분이 계셨고, 해당 아파트로 취재를 나간 적도 있다. 하지만 단기간 취재로는 그분들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다. 더구나 고속버스에서 승차 관리를 하시는 분들이나 빌딩에서 경비를 서시는 분들을 눈여겨본 적은 더더욱 없다. 그분들이 일하는 환경, 처우에 대해 생각했을 봤을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조 선생님 덕분에 알았고, 속상했다. 조 선생님의 기록을 본 후배가 꼭 책으로 출간해야 한다고 권했을 때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내가 직접적으로 그 분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더 눈여겨보고, 친절하기. 그리고 내가 무언가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 함께 하기일 것이다.
두 분의 책을 읽고 마음이 아팠지만 한 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특히 김지은씨에게 책을 써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스스로를 대변할 힘이 더 컸던 안희정 씨 측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였던 것 같다. 소위 말해 ‘받은글’이라며 전해지는-주로 김지은 씨를 ‘이상한 여자로 만드는 이야기-따위를 재미로 읽고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지은 씨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나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힘들었겠다’ ‘참 엄청난 용기를 냈구나’하는 마음이 든다. 앞으로 꿈꾸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응원해 주고 싶다.
두 사람의 떨리는 목소리는 여러 사람에게 묵직한 울림을 줬고, 계속해서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이 파동이 당장 변혁의 파도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분명 조금씩 변화를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그 파동이 바로 지금의 시대 정신이 아닐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들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대변(representation)할 수 있기를 바란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드창_숨 /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0) | 2019.07.07 |
---|---|
먹고 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0) | 2019.02.23 |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0) | 2019.02.23 |
'나는 왜 이럴까'에 대한 행동경제학의 대답 (상식 밖의 경제학 / 댄 애리얼리) (2) | 2019.01.20 |
나도 한다, 개인주의자 선언! (개인주의자 선언/문유석) (2) | 2019.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