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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창_숨 /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by 수지니★ 2019. 7. 7.

때로는 ‘지금 그대로 괜찮다’고 말하는 따뜻한 에세이보다 ‘이 우주는 아무런 목적 없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무심한 과학적 사실이 더 큰 위로로 다가온다. 거기에 흥미로운 상상력이 빚어낸 사람의 이야기가 더해진다면 그 위로에 대한 공감은 배가 된다. 내게는 테드 창의 작품들이 그렇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부터 최근 출간된 <<숨>>에 수록된 여러 작품을 읽다보면 각 구슬을 꿰고 있는 ‘실’을 어렴풋 느낄 수 있다. 특히 ‘우리는 운명을(미래를) 바꿀 수 없다’와 같은 결정론적 시각이 두드러진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 화자인 나는 ‘세월의 문’을 통과해 과거로 돌아가지만 아내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초단편작 <우리가 해야할 일>에서는 그러한 메시지가 더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자유의지가 환상인 이상, 누가 무동무언증에 빠지고 누가 빠지지 않을지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예측기가 당신에게 끼칠 영향을 선택할 수 없다. 누군가는 굴복할 것이고 누군가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 경고는 그 비율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한 것일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서도 마찬가지다. 데이나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고교 단짝 친구 비네사의 인생을 망쳤다는 죄책감을 지고 산다. 그녀는 비네사에게 속죄라도 하려는 듯 끊임없이 물질적 도움을 건넨다. 하지만 나중에 누군가(개인적으로 냇으로 추정)가 보내준 ‘프리즘’ 영상을 통해 비네사의 삶은 자신의 선택 때문이 아닌, 비네사의 행동 때문에 망가진 것임을 깨닫는다. 데이나가 어떤 선택을 한 경우에도 비네사의 삶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테드 창은 작품을 통해 설령 모든 것이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고 해도, 우리의 선택과 그에 따른 행동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메시지가 작품의 고갱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무엇도 과거를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개가 있고, 속죄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단지 그뿐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탐험자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무렵 나는 죽은 지 오래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고별의 말을 남긴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고 느낀다. 지금 이 글을 각인하면서, 내가 바로 그렇게 묵상하고,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숨>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삶을 살고,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는 듯한데, 나는 이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삶은 계속되기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에.

 

“주여, 저는 당신이 굽어보고 계시든 그렇지 않든, 애리소나 발굴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설령 인류가 우주가 창조된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저는 여전히 우주가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라는 질문의 해답을 계속 탐구하겠습니다. 이런 탐구야 말로 제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그것을 선택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옴팔로스>

 

옴팔로스의 이 고고학자는 전작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속 주인공 언어학자와도 닮았다. 외계 존재 헵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한 뒤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인식하게 돼 ‘딸의 죽음’ ‘남편과의 헤어짐’ 등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두 알지만,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모습이 말이다.

 

작가는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해야 할 이유도 제시한다.

 

“이 세계에서 당신이 선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의미있는 일입니다. 미래에 분기될 세계들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죠. 당신이 선한 선택을 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미래에 이기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당신이 일진이 안 좋은 세계에 있다고 해도 말이죠.”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어떻게 보면 ‘모든 일은 하늘에서 정하실 지어니(과학적으로 결정돼 있을지니) 네 자리에서 착하게 열심히 살아라’라는 어른 동화의 교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교훈을 찾아가는 여정이 수준 높은 지적 자극과 천부적 상상력 덕에 이토록 짜릿하니, 믿고 읽을 수밖에.